전시 개막의 의미와 배경
국가유산청 국립고궁박물관은 2025년 8월 14일부터 10월 12일까지, 개관 2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 ‘창덕궁의 근사(謹寫)한 벽화’를 연다. 이번 전시는 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개최되며, 궁중회화 중에서도 특히 귀하고 섬세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는 ‘창덕궁 벽화’를 주제로 삼는다. 전시 제목에 들어간 ‘근사(謹寫)’는 ‘삼가고 정성껏 그린다’는 뜻으로, 단순 복제가 아니라 원작의 형태·색감·질감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예술적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조선시대 화원들이 보여주었던 엄격한 장인 정신과, 현대 보존 전문가들이 잇고 있는 전통을 모두 아우른다.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대에 창건된 후 조선 왕조 5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가장 오랫동안 실제 거처로 쓰인 궁궐이었다. 특히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의 자연 지형에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된 후원과, 전각 내부를 장식하는 벽화는 단순 미술품이 아니라 왕실 권위와 이상 세계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격변의 역사를 거치며 상당수 벽화가 소실되거나 훼손되었다. 이번 특별전은 그 잔존 기록과 보존 성과를 한자리에 모아, 원작의 예술성과 역사성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구성했다.
또한, 이번 전시는 국립고궁박물관의 20년 성과를 집약한 상징적 행사이기도 하다. 개관 이후 박물관은 왕실 유물의 수집·보존·연구·전시를 통해 조선의 궁중문화를 국내외에 소개해 왔다. 이번 특별전은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니라, 문화유산의 ‘과거-현재-미래’를 연결하는 장으로, 궁궐 벽화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그리고 왜 지켜야 하는지를 관람객에게 직접 묻는 자리다.
창덕궁 벽화의 역사와 미학적 가치
창덕궁 벽화는 건물의 용도와 성격에 따라 주제와 구성이 달랐다. 예를 들어 왕의 집무와 의례가 이루어지는 공간에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처럼 왕권의 절대성과 천지 질서를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이는 붉은 해와 푸른 달, 다섯 개의 봉우리가 균형을 이루는 구도로, 왕이 곧 천명(天命)을 받들어 세상을 다스린다는 정치적 의미를 담았다. 반면 왕비의 생활 공간이나 연회장에는 화려한 색채의 모란도, 화조도, 산수화 등이 배치되어, 부귀와 장수, 조화를 기원했다.
미학적으로 창덕궁 벽화는 중국 명·청대 궁정회화의 형식을 수용하면서도, 조선 특유의 절제와 단아함을 구현했다. 예를 들어 색채는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농담(濃淡)과 채도의 미묘한 변화를 통해 입체감과 깊이를 부여했다. 또한, 화면 구도는 건물의 구조와 빛의 방향을 고려해 설계되었으며, 관람자의 시선 동선을 유도하는 장치로도 기능했다. 벽화 제작에는 석채(石彩)와 식물성 안료, 금박, 은박 등이 쓰였고, 목재 벽면 위에 백토를 바른 뒤 밑그림을 그리고 채색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 과정에서 사용된 전통 붓, 채색 그릇, 안료 가루 등을 실물로 소개해, 관람객이 당시 화원들의 작업 환경을 직접 체감할 수 있다.
또한 창덕궁 벽화는 단순 장식물 이상의 역할을 했다. 그것은 왕실의 세계관을 시각화한 ‘이데올로기의 언어’이자, 외국 사신에게 조선의 문화를 과시하는 ‘외교적 도구’였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벽화를 미술사적 관점뿐 아니라, 정치·사회사적 맥락에서도 조명하며, 다층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특별전의 전시 구성과 주요 유물
이번 특별전은 세 가지 큰 섹션으로 나뉜다. 첫 번째 ‘왕실의 벽, 권위의 상징’에서는 인정전·선정전·희정당 등 주요 전각에 그려졌던 상징적 벽화를 모사 작품과 함께 전시해, 공간별 회화 주제를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서는 일월오봉도, 봉황도, 모란도 등의 대형 모사 패널이 핵심 볼거리다. 두 번째 ‘그림 속의 이상 세계’에서는 자연과 길상 문양을 담은 화조도, 산수화, 영모도 등을 전시해 왕실이 추구한 가치와 이상향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곳에서는 부귀영화를 뜻하는 모란, 장수를 상징하는 학과 거북, 평화와 조화를 나타내는 연꽃과 물고기 등 다양한 도상을 세밀하게 감상할 수 있다.
세 번째 ‘보존과 재현의 기록’은 창덕궁 벽화의 원형 보존과 모사 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과거 실측 도면, 흑백 사진 자료, 채색 분석표, 디지털 복원 영상 등 다양한 자료가 공개되어, 벽화 보존이 단순 복원이 아니라 과학·기술·예술이 결합된 종합 작업임을 보여준다. 특히, 색채 복원에는 비파괴 분석기기(XRF, XRD 등)를 활용해 안료의 성분과 퇴색 정도를 측정하고, 이를 토대로 원래 색감을 재현한 사례가 소개된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인정전 내부 벽화를 실물 크기에 가깝게 재현한 대형 모사물이다. 관람객은 마치 전각 내부에 들어온 듯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으며, 평소 일반인 출입이 제한된 왕실 공간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일부 작품에는 AR(증강현실) 기능이 적용되어, 스마트 기기로 비추면 채색 과정과 원래 색감을 복원한 영상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디지털 요소는 전통문화에 새로운 감각을 부여하고, 젊은 세대 관람객의 흥미를 끌어낸다.
문화재 보존과 전승의 관점에서 본 의의
창덕궁 벽화는 그 자체로 예술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지닌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목재 구조물의 변형, 습기와 곰팡이, 햇빛에 의한 퇴색, 인위적 훼손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보존이 어려워진다. 이번 전시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보존과 전승의 노력을 대중에게 직접 보여준다는 점이다.
‘근사’라는 행위는 단순 복제와 다르다. 그것은 원작의 형태와 색을 최대한 충실히 재현하는 동시에, 작품이 담고 있는 시대적 배경과 상징성까지 살려내려는 고도의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보존 과학자들은 미세한 균열의 진행 속도, 안료의 화학적 변화, 표면 오염물질의 성분 등을 측정하고 분석한다. 또, 전통 채색 기법과 현대 재료 과학을 결합해 원작과 유사한 재현물을 제작한다.
이번 전시는 관람객이 문화재 보존의 ‘보이지 않는 노력’을 인식하게 해 준다. 그것은 단지 옛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 우리의 문화적 뿌리를 온전하게 전달하는 일이다. 전시장을 나서는 순간, 관람객은 창덕궁 벽화를 단순히 과거의 유물로 보지 않고, ‘살아있는 문화’로 인식하게 된다. 이처럼 보존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다리이며, 이번 특별전은 그 다리 위에서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성찰하게 만든다.
관람 정보와 마무리
‘창덕궁의 근사한 벽화’ 특별전은 2025년 8월 14일부터 10월 12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진행된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이며, 금·토요일에는 오후 9시까지 야간 개장이 운영된다. 입장은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가능하다. 박물관은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위치해 있으며,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와 바로 연결된다. 입장료는 무료다.
전시 관람 전후로 박물관 1층 상설전시실을 함께 둘러보면, 조선 왕실의 생활 유물과 기록물, 의례 도구 등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박물관 인근 경복궁, 서촌, 청와대 앞길 등과 연계한 도보 코스를 계획하면 역사 체험의 폭이 넓어진다. 전시 기간 중에는 전문가 해설 프로그램과 어린이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돼,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도 적합하다.
이번 특별전은 단순히 시각적 즐거움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창덕궁 벽화라는 매개를 통해, 조선 왕실의 가치관·미학·정치·사회상을 함께 읽어내고,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한다. 왕실의 색과 숨결이 깃든 벽화를 눈앞에서 마주하는 순간, 관람객은 과거와 현재가 한 점에서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은, 문화유산이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과 미래를 비추는 거울임을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