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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향한 길: 코리아 메모리얼 로드를 따라 만나는 서울의 기억 :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서울의 공간들

by 로미집사 2025. 8. 8.

평화는 멀리 있지 않다.

 

전쟁의 상흔은 총성이 멎는다고 끝나지 않는다. 포화가 멈춘 자리에는 무너진 건물만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기억과 말할 수 없는 상실이 남는다. 그리고 그 기억은 도시의 구조 속에, 사람들의 말투와 표정 속에, 그리고 시간이 멈춰 선 듯한 공간 속에 고요히 스며들어 있다. 서울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이 거대한 도시는 기술과 문화, 경제의 최전선에 있는 듯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여전히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이라는 상처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우리가 서울의 거리 곳곳을 걷다 보면 예상치 못한 자리에 기념비 하나, 무명용사의 묘, 오래된 성곽의 잔재와 같은 ‘기억의 흔적’과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화려한 도시 경관 속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말한다. “이곳에도 전쟁이 있었다”고. 그 조용한 증언 앞에서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과거를 기억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깨닫는다.

평화를 향한 길: 코리아 메모리얼 로드를 따라 만나는 서울의 기억 :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서울의 공간들
평화를 향한 길: 코리아 메모리얼 로드를 따라 만나는 서울의 기억 :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서울의 공간들

 

‘코리아 메모리얼 로드(Korea Memorial Road)’는 단순한 전쟁 유적지 답사 루트가 아니다. 이 길은 희생을 기억함으로써 오늘의 일상을 되새기고, 평화를 성찰하게 만드는 상징적 여정이다. 서울의 도심을 따라 이어지는 기념관, 추모비, 전투기념지, 성곽길은 각기 다른 시점과 사건을 담고 있지만, 하나의 공통된 메시지를 품고 있다. 그것은 바로 “기억을 통해 평화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 글은 서울 곳곳에 남겨진 전쟁의 흔적과 그 위에 세워진 평화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여정이다. 단절되지 않은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자, 앞으로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실천의 방향이 된다. 평화는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에도 삶의 공간 속에 살아 있는 실재다.

 

지금부터 서울을 걷는다. 총성은 사라졌지만, 그 여운은 여전히 남아 있는 이 도시 위를 천천히 걷는 동안, 우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평화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평화는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기억 속에, 거리 위에, 그리고 우리의 발걸음 안에 있다.

 

 

 

전쟁기념관 – 평화는 기억에서 시작된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에 위치한 전쟁기념관은 코리아 메모리얼 로드의 가장 핵심적인 시작점이자, 전쟁과 평화의 본질을 직면하는 공간이다. 1994년 개관 이후, 이곳은 단순한 전쟁 박물관의 기능을 넘어, 한국의 근현대사가 겪어온 수많은 갈등과 희생을 집약한 기억의 장소로 자리 잡았다. 전쟁기념관의 전시 구성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반도의 주요 전쟁사를 연대기 순으로 조망하면서도, 각 전쟁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간 개인들의 서사를 함께 담아내고 있다.

 

 

 

 

 

 

 

 

 

 

 

 

기념관 외부 광장에 위치한 ‘형제의 상’은 이 공간 전체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조형물이다. 남북으로 갈라진 형제가 적으로 마주했다가 다시 부둥켜안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 조각상은, 이념과 체제 이전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일깨운다. 관람객들은 그 앞에서 자연스레 말문을 닫는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깊이와 기억의 무게가 그 공간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념관 내부에 들어서면, 6.25 전쟁실, 참전국 기념실, 전쟁 체험실, 무기 전시장 등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전시 공간들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단순히 무기나 유물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참전 장병들의 증언과 민간인의 피해, 전장의 참상까지 함께 소개하며 전쟁이 남긴 물리적 파괴와 정신적 상흔을 입체적으로 전달한다. 특히 청소년이나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는 이 공간이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감정적·도덕적 성찰의 기회로 작용한다.

 

많은 이들은 관람을 마치고 나올 때, 하나의 질문을 품는다. “이 모든 희생과 고통 위에 서 있는 지금의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전쟁기념관은 그 어떤 정치적 주장도 하지 않는다. 대신, 보여주고 느끼게 하며 스스로 질문하게 만든다. 그것이 이 공간이 가진 교육적 힘이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다.

평화를 향한 길: 코리아 메모리얼 로드를 따라 만나는 서울의 기억 :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서울의 공간들
평화를 향한 길: 코리아 메모리얼 로드를 따라 만나는 서울의 기억 :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서울의 공간들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다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희생을 기억하고, 그 위에 세워진 오늘의 가치를 자각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전쟁기념관은 이 중요한 진실을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말은 지금도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수많은 발걸음과 마주하며 울려 퍼지고 있다.

 

 

 

서울현충원 – 이름 없는 이들이 남긴 평화의 터전

 

서울 동작구 한강 남쪽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국립서울현충원은 대한민국을 위해 생명을 바친 수많은 이들이 영면해 있는 기억과 추모의 공간이다. 1955년 조성된 이곳은 군 장병, 애국지사, 순국선열은 물론 무명용사들까지 함께 모신 국가 최대 규모의 국립묘지로, 전쟁과 분단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온 서울에서 가장 숭고한 장소 중 하나로 손꼽힌다.

 

 

 

 

 

 

 

 

 

 

 

 

현충원 입구를 지나면 길게 이어진 수목길과 경건한 분위기가 방문객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질서정연하게 배치된 묘역에는 이름과 계급, 생몰연도가 새겨진 비석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의 묘비, 즉 ‘무명용사의 묘’도 함께 존재한다. 가족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존재들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기틀을 지탱해냈다는 사실은, 방문객에게 묵직한 감정과 함께 잊지 말아야 할 책임감을 안겨준다.

 

이곳은 단지 고인을 기리는 장소를 넘어, 역사를 교육하고 평화를 전하는 살아 있는 교육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현충일이나 6.25 전쟁 기념일에는 학생들과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몰려들고, 호국 해설사 프로그램, 묵념 체험, 묘역 해설 탐방 등이 활발히 진행된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어린 세대는 단지 과거를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왜 그들이 싸워야 했는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현충원은 영웅주의를 강조하지 않는다. 거대한 동상도 없고, 전투의 승리를 기리는 화려한 조형물도 없다. 대신 수많은 작은 비석들이 조용히 말하고 있다. 전쟁은 결코 찬란한 이야기가 아니며, 그 이면에는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상실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해 우리가 지금 이 땅 위에 서 있을 수 있게 되었음을 일깨운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어선 안 된다.”

평화를 향한 길: 코리아 메모리얼 로드를 따라 만나는 서울의 기억 :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서울의 공간들
평화를 향한 길: 코리아 메모리얼 로드를 따라 만나는 서울의 기억 :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서울의 공간들

 

현충원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전쟁의 기억은 단지 아픈 과거가 아니라, 평화를 향한 현재의 실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그저 묘역을 바라보고 지나치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이름, 한 무명의 묘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 존재가 남긴 침묵의 의미를 되새기며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

 

서울현충원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묵념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평화의 터전이다. 그리고 그 위에는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이 오늘도 조용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 정의와 평화는 함께 간다.

 

전쟁의 기억을 말할 때 우리는 종종 총칼이 부딪힌 전장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평화를 위한 투쟁은 물리적 충돌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전에, 불의한 구조와 억압에 맞선 정신의 저항, 정의에 대한 실천적 사유가 먼저 존재해야 한다. 남산 정상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바로 그 정신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1909년,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탈의 상징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다. 표면적으로는 ‘의거’로 기록되지만, 그의 행동은 단지 한 사람을 향한 복수가 아니었다. 그는 철저한 사전 준비와 정치적 사유를 바탕으로 ‘동양평화론’을 주장하며, 조선, 중국, 일본이 협력하여 서구 제국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구상을 세웠다. 당시 제국주의 질서에 맞선 이 사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동북아 평화 구상의 초석으로 읽힐 만큼 시대적 통찰력과 실천성을 갖춘 이론이었다.

 

기념관 내부에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 유품, 재판기록, 그리고 ‘동양평화론’ 초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마지막 유언과 가족에게 남긴 편지, 일본 법정에서의 자필 진술문은 한 인간의 내면과 신념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특히 유묵에는 단호하면서도 담담한 필체로 쓰인 글귀들이 눈길을 끈다. "爲國獻身 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문구는, 단순한 민족주의를 넘어선 보편적 정의감과 윤리의식을 느끼게 한다.

 

안중근은 무력을 사용한 인물이었지만, 그 목적은 오히려 폭력의 종식을 통한 공존과 평화에 있었다. 그는 법정에서도 끝까지 당당했고, 자신의 죽음이 조선만이 아니라 동양 전체의 평화를 여는 씨앗이 되길 바랐다. 그의 사상은 이념적 대립과 냉전 구도가 여전히 지속되는 오늘의 동북아시아에서도 여전히 ‘가능한 평화의 모델’로서 조명될 가치가 있다.

평화를 향한 길: 코리아 메모리얼 로드를 따라 만나는 서울의 기억 :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서울의 공간들
평화를 향한 길: 코리아 메모리얼 로드를 따라 만나는 서울의 기억 :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서울의 공간들

 

서울 한복판, 시민들과 관광객이 분주히 오가는 남산에 위치한 이 기념관은 격식보다는 침착함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은 규모지만, 전시의 깊이와 철학은 결코 작지 않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난 뒤, 인근 남산 팔각정에서 서울 전경을 내려다보는 순간, 우리는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과연 평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이 공간은 단지 한 영웅의 이야기를 전하는 곳이 아니다. 정의 없는 평화는 허상이라는 진실, 그리고 참된 평화는 언제나 정의를 향한 투쟁 속에서 태어난다는 원칙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말하고 있다. 안중근의 정신은 그곳에 아직 살아 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북악산 성곽길 – 오래된 경계에서 평화를 보다.

 

서울 북쪽의 북악산 서울성곽길을 따라 걷다 보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근현대사의 전쟁 기억을 넘어, 훨씬 더 오래된 ‘국가 방어의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이 성곽은 1396년, 조선 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면서 축조한 도시 방어 체계의 핵심이다. 북악산은 서울 도성의 북쪽을 감싸고 있었으며, 이곳에 설치된 성곽과 문은 외세의 침입을 막고, 수도를 지키기 위한 물리적·상징적 경계였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단지 돌을 쌓아 만든 성벽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이 성곽은 곧 국가의 생존선이자, 백성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울타리였다. 따라서 이 길은 단순한 군사 시설이 아니라, 당시 조선 사회의 세계관, 질서, 국가관이 응축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북악산 성곽길은 창의문(자하문)에서 시작해 숙정문과 청운대, 말바위 안내소를 지나 삼청각으로 이어지는 경로로 구성되어 있다. 길을 걷다 보면 성벽 너머로 펼쳐지는 서울 도심의 풍경과, 과거를 간직한 돌길이 만들어내는 이중적인 시간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자유롭게 이 길을 걷지만, 이곳은 한때 누군가가 지켜야 했던 전선이자, 침입과 공방의 현장이었다.

 

성곽 곳곳에는 감시초소, 옛 성문터, 군사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흔적들은 ‘전쟁’이라는 개념이 반드시 총칼과 포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때로는 경계하고 대비하는 일, 그 자체가 전쟁의 전조이며, 동시에 평화를 지키기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이제는 시민들에게 걷기 좋은 산책길로 자리 잡은 이 성곽길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의 전쟁을 기억하며 현재의 평화를 음미하는 공간이 되었다. 고요한 산책길을 따라 걷다 보면, 역사적 경계가 평화로운 일상의 일부로 전환되는 과정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과거에는 적을 막기 위한 곳이었지만, 오늘날 이곳은 기억과 성찰을 통해 내면의 경계를 마주하는 길로 변화되었다.

평화를 향한 길: 코리아 메모리얼 로드를 따라 만나는 서울의 기억 :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서울의 공간들
평화를 향한 길: 코리아 메모리얼 로드를 따라 만나는 서울의 기억 :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서울의 공간들

 

북악산 성곽길은 ‘방어’라는 개념이 더 이상 적을 막기 위한 무장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일깨워 준다. 진정한 평화란, 두려움 속에서 무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성찰하고 현재를 이해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성곽을 따라 걷는 이 길은 코리아 메모리얼 로드의 한 축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평화의 철학을 품고 있는 장소다. 오늘 우리가 이 길을 걷는 것은 단지 조선의 흔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기억과 책임, 그리고 평화를 향한 감각을 다시 일깨우는 행위 그 자체다.

 

 

 

수송동 6.25 격전지 기념비 – 도심 한복판의 침묵

 

서울 종로구 수송동. 조계사와 인사동이 가까운 이 지역은 낮이면 직장인들로 붐비고, 저녁이면 식당과 카페로 가득 찬 일상적인 서울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번화한 도심 한가운데, 빌딩 숲과 인파 사이에 아주 작고 조용한 공원 하나가 숨어 있다. 그 안에는 별다른 장식도, 큰 설명도 없이 세워진 ‘6.25 격전지 기념비’가 있다. 지나가는 사람 대부분이 그 의미조차 모른 채 스쳐 지나가지만, 이 작은 비석은 그 자리에 서울의 기억 중 가장 격렬하고도 아픈 순간을 조용히 품고 있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하면서 도심 곳곳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수송동 일대는 행정기관과 군사 요충지가 밀집해 있었기에 양측 모두가 놓칠 수 없는 전략적 지역이었다. 국군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물자와 병력의 열세로 인해 무너졌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도 휘말려 희생당했다. 당시의 참혹한 상황은 생존자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었고, 도시가 재건되고 개발되면서 그 자취는 점점 사라졌다.

 

그런 가운데 세워진 이 격전지 기념비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전장의 흔적 중 하나다. 높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단순한 석비 위에 당시의 상황을 요약한 짧은 문구와 지도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소박한 형식이야말로 이 기념비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기억은 반드시 거창할 필요는 없다'는 메시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일상 속에서 기억을 잊고 살아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그 자리는 직장인들의 흡연 장소가 되기도 하고, 점심시간 산책 코스가 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시민은 이곳이 한때 총탄이 오가고 건물이 무너졌던 최전선의 한복판이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잠시 멈춰 서서 기념비를 바라보고, 그 위에 적힌 짧은 설명을 읽는 순간, 도시는 다시 기억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전쟁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사는 공간에서 일어났던 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평화를 향한 길: 코리아 메모리얼 로드를 따라 만나는 서울의 기억 :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서울의 공간들
평화를 향한 길: 코리아 메모리얼 로드를 따라 만나는 서울의 기억 :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서울의 공간들

 

수송동 6.25 격전지 기념비는 ‘기억의 사각지대’에서 말없이 평화를 지키는 존재다. 크지도 않고, 유명하지도 않지만, 그 조용한 존재감이야말로 진정한 메모리얼의 형태일지 모른다. 전쟁의 참혹함은 기록에서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걷고 있는 이 거리 위에도 남아 있다.

 

기억은 선택이 아니라 책임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때로 이렇게 도심 한복판의 침묵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 기념비 앞에서 우리는 말없이 묻는다. “이 평화는 무엇을 대가로 얻은 것인가?” 그리고 그 질문 자체가, 우리가 계속해서 이 기억을 이어가야 할 이유가 된다.

 

 

 

평화는 결국 사람의 이야기다.

 

전쟁을 기억하는 기념관, 성곽, 추모비, 묘역. 이들은 모두 물리적 형태를 지닌 ‘기억의 그릇’이다. 하지만 그 안에 아무런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다면, 그것은 단순한 구조물에 불과하다. 진정한 평화는, 그리고 진정한 기억은 그 안에 '사람의 이야기'가 담길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기억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이름이 있는 혹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예컨대 한강 방어선에서 끝까지 서울을 사수하려 했던 무명의 장병들. 병력과 장비, 전략 모든 면에서 열세였지만 후퇴하지 않았던 그들은 도시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들의 희생은 역사의 구체적인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또한 우리는 도심의 총탄 속에서도 대피하지 못한 채 남겨졌던 시민들의 삶을 떠올려야 한다. 이들은 전쟁의 계획에도 기록에도 없지만, 폭격을 피해 건물 지하로 숨고, 어린 자녀의 손을 붙잡고 도망쳤던 사람들, 다시 돌아온 도시에서 폐허 위에 삶을 복원한 그들의 모습은 전쟁을 견딘 사람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안중근처럼, 무장을 들고 싸우되 그것이 평화로 향하기 위한 도구여야 한다고 믿었던 이들의 철학도 잊어선 안 된다. 정의 없는 평화는 허구이며, 폭력 없는 정의 역시 환상일 수 있음을 그들은 일찍이 깨달았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이처럼 수많은 이름들, 그리고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라는 단어를 실질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다는 상태가 아니다. 누군가가 희생한 결과이며, 또 누군가가 그것을 기억하고 지키려는 태도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는 가치다. 그것은 한 사람의 외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려는 마음, 멈춰 서는 태도, 공감하는 시선 속에서 서서히 자라나는 생명체와 같다. 평화는 선언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질문이며, 그것에 답하기 위해 살아가는 실천이다.

평화를 향한 길: 코리아 메모리얼 로드를 따라 만나는 서울의 기억 :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서울의 공간들
평화를 향한 길: 코리아 메모리얼 로드를 따라 만나는 서울의 기억 :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서울의 공간들

 

기념비를 세우는 것도, 전시관을 만드는 것도, 묘비 앞에서 묵념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고, 그 뜻을 오늘의 삶에 연결하는 일이다. 우리가 지금 걷는 메모리얼 로드의 진짜 목적도 여기에 있다. 기억은 인간의 행위이고, 평화는 인간의 의지이며, 그 모든 것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에서 시작되고, 다시 사람을 향해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없이 질문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할 평화는 누구의 이야기 위에 놓여 있는가?”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평화의 가능성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